강인하고 아름다운 사람, 박지영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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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ㅣ 칼럼 강인하고 아름다운 사람, 박지영 씨 “나중에 나가겠다”던 그 말 기억하겠습니다

기사입력2014-04-18 14:17

김창훈 기자 (ckim2014@junggi.co.kr) ㅣ다른기사보기

무릎까지 하얗게 눈이 쌓인 새벽, 열아홉 살 누나는 도장을 찍듯 눈길에 발자국을 남기고, 열세 살 막내는 그 자국을 따라 밟았다. 미끄럽지도, 양말이 젖어오지도 않는 평화로운 새벽길이었다. 세상이 깨어나기도 전, 막내를 기차역까지 데려다 준 누나는 휘적휘적 온 길을 되짚어 집으로 돌아갔고, 막내는 누나를 잊고 즐거운 여행길에 나섰다.

고작해야 열아홉 살, 그 때 내 누나도 겁 많고 추위 많이 탈 가녀린 여자아이였을 것이다. “어머니는 강한” 맥락이었을까? 맞벌이 하는 어머니 손길을 자주 못 받는 막내가 안쓰러웠는지, 겨우 여섯 살 터울의 누나는 때때로 어머니 같았다. 이것저것 끄집어내 야단칠 때는 매의 눈을 치켜뜨다가도 금세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다독거려주곤 했다. 냉철함과 따뜻함, 까다로움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내 기억 속의 여성성이다.

“너희들 구하고 누나는 나중에 나갈게” 세월호 승무원 스물두 살 박지영 씨는 단원고 학생들에게 이 말을 남기고는 유명을 달리했단다. 가정 사정으로 대학공부를 접었고, 청해진해운에 입사해서는 자신의 배로 가족들 제주여행까지 챙겼다는 사람이다. 구명조끼까지 승객들에게 양보하고 선장도 하지 못한 ‘퇴선 명령’을 내린 것도 그였단다. 뱃전에서 하릴없이 머뭇거리던 승객들은 그의 채근에야 비로소 바다에 뛰어들었단다. 누구보다 용감하고 강인한, 그리고 아름다운 이 여인 덕분에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었다.

어제는 대통령이 세월호 사고 현장을 찾았다. 국가 책임자가 아닌 어머니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손이라도 잡아줘 자식 잃은 가족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게 우리네 정서다. 그러나 생각이 너무 짧았다. 이런 상황에서 의전이나 경호는 교통에 영향을 미쳐 구조장비와 인력 수급에도 좋지 않다. 누군가 의도했음직한 난 데 없는 박수소리는 심각한 악수였다. 멀리서 힘이 돼줘야 할 때가 있고, 두 손 잡고 함께 울어줘야 할 때가 있다.

모든 국민이 아픔으로 신음하는 오늘 같은 날, 대통령의 여성성이 빛을 발해주면 좋겠다. 자식의 안전을 위해서는 메피스토와도 타협할 수 있고, 죽음의 위협에도 맞설 수 있는, 온당치 않게 이를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용서치 않는, 그러나 1%의 가능성에도 포기하지 않고 두 눈 시퍼렇게 감시하는,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맞잡고 함께 울어줄 수밖에 없는, 그래서 퉁퉁 부은 얼굴로라도 더디게나마 상처를 치유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그런 여성성이면 좋겠다.